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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요일의 늦은 오후, 눈을 뜬 소리가 방을 나오자 티비를 보고 있는 태원이 있었다. 대체 뭘 보기에 뚫어져라 화면만 보는 건지, 궁금해져 소파에 슬그머니 앉아 물었다. 

 

 "뭐하냐?"

 

 소리의 물음에 고개만 옆으로 돌린 태원이 아무 높낮이 없이 말했다. 지구 종말이 다가오고 있대. 뭐? 그 목소리와, 표정이 너무나도 무감하여 순간 자신이 잘못 들은건가 싶었다. 허나 뉴스에서는 태원이 했던 말과 같은 주제가 나오고 있었다. 지구 종말. 지구종말론이야 예전부터 귀에 딱지가 나도록 들어온 이야기였다. 백만년만의 무더위, 역대 최고의 폭염, 이상 기후. 과학자들은 이러한 문장들을 조합해 지구 종말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어쩌면, 올해가 마지막 여름이 될 것이라고 말이다. 지구 종말은 지구에서 모든 산소가 사라지게 되며 올 것이라는 가설이었다. 산소를 잃은 바다는 수소밖에 남지 않아 모조리 증발해버리고, 지각과 맨틀 속 산소또한 사라지면서 지구는 30% 정도 가벼워질 것이며, 중력 또한 감소하여 지구 반경이 줄어들고 자전 속도가 빨라질 것이라 했다. 산소가 없어지는 것으로 인류는 생멸할 거라는 이야기. 예언가가 말하기로,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단다. 듣기만 해도 머리 아픈 이야기에 소리가 티비를 끄고 말했다. 야, 밥이나 먹자. 

 

 

 

 

 

 

 

 

 

마지막 여름

 

 

 

 

 

 

 

 

 

 "이쪽으로 패스!"

 

 체육관에서는 피구 연습이 한창이었다. 어떤 철학자가 '내일 지구에 종말이 온다고 하더라도 나는 사과나무를 심겠다.'라는 말을 했었던 것 같은데…, 내일 당장 지구가 종말하는 건 아니라지만 지구 종말론이 떠돈 건 마치 꿈이었다는듯 평온했다. 피구는 소리가 나가는 종목이 아니었기에 벽에 기대 앉아 가만히 모습을 지켜보았다. 저 멍청이. 가만히 멍때리다 얼굴 정면에 직격으로 공을 맞은 태원을 보고 소리가 혀를 끌끌 찼다. 선 안에서 빠져나온 태원의 발걸음은 소리가 있는 곳을 향했고, 자연스레 소리의 옆에 앉았다. 가까이서 보니 콧잔등이 좀 발개져있었다. 코를 살살 문지르는 태원에게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느라 공이 오는 줄도 몰랐냐고, 핀잔을 칭칭 둘러싼 걱정어린 말에 태원이 머쓱한 웃음을 짓다 물었다. 소리 너는 어떻게 생각해? 주어따위 없는 말에 소리가 눈을 가늘게 뜨고 되물었다. 뭐를. 그러자 태원이 느릿하게 말했다. 지구 종말 말이야. 아. 태원이 하는 말의 요지를 알아차린 소리가 어제 봤던 뉴스를 상기하며 솔직하게 대답했다.

 

 "그냥 미치광이의 헛소리로 밖에 안 들리는데."

 "음……. 그럼 지구 종말이 오기 전까지 뭐할지, 그런 생각은 안 했겠네."

 

 안 했는데. 너는 달리 생각해둔 거라도 있냐? 응, 있어. 뭔데? 호기심 어린 소리의 물음에 태원이 입을 열었다. 나는… 지구 종말이 온다면…… 연애를 할 거야. 연애? 소리가 별 이상한 놈을 다 보겠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지구 종말이 오는데 연애라니, 결의에 가득 찬 목소리기에 무슨 말을 할까 싶었더니, 참 터무니 없는 소리가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태원은 아주 진심이었다. 죽기전에 연애 한 번 쯤은 해봐야 할 거 아냐. 아, 그러세요…. 바닥에서 벌떡 일어난 태원이 말했다. 소리 너도 생각해봐. 지구 종말이 오기 전까지 뭘 할 건지. 그러고서는 다시금 피구를 하는 쪽으로 돌아갔다. 그러니까 나는… 애초에 믿지도 않는다니까……. 소리의 웅얼임이 공중에 흩어졌다. 당연하지만 태원은 그 목소리를 듣지 못했다. 

 

*

 

 소리가 '지구종말론'이 진짜다, 라는 생각을 한 건 그로부터 고작 한 시간이 지난 뒤였다.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새하얗고 자그마한 눈이, 8월의 한여름에 말이다. 정말 아이러니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이상 기후인 것이다. 눈부시게 내리 쬐는 태양과 푸르른 하늘, 선명한 초록색을 띈 풍경에 더해진 하얀 눈은 지구의 종말이 다가오고 있다는 증명이었다. 

 

 "와아. 진짜 마지막을 앞뒀나봐. 여름에 눈이 오는 꼴을 다보네."

 

어느새 다가온 태원이 눈을 보며 입을 헤벌레 벌리고 있었다. 일순 소리는 지구 종말이 온다면 연애를 한다던 태원의 말이 떠올랐다. 태원은 아주 진심 같았고, 지금 세상이 미쳐돌아 종말이 오고 있으니.

 

 "야, 이태원."

 "응?"

 "너 지구 종말이 오면 연애 한다고 했지."

 "아, 아…. 그랬지."

 "그거 누구랑 할 건데?"

 

 소리의 말에 이마에 주름을 만든 태원이 골똘히 고민했다. 나를 좋아하는 사람이랑? 없으면 때려치우지 뭐. 아하하 웃으며 말하는 태원의 팔을 꽉 쥔 소리가 입을 몇 번 달싹이다 이내 말했다. …그럼 나랑 하자. 

 

 "뭐?"

 "연애… 나랑 하자고."

 

 너를 좋아하는 사람이랑 할 거라며. 그러니까…… 종말까지만. 소리가 입을 다물었다. 고개를 푹 숙인 소리에 태원은 대강 무슨 뜻인지 감이 잡혔다. 그러나 태원은 긍정, 혹은 부정의 답을 내리는 대신에 질문을 던졌다. 

 

 "소리야."

 "…."

 "너 나 좋아해?"

 

소리가 빙빙 돌려 말했던 핵심이 담긴, 그런 질문을 말이다.

 

*

 

 예언자가 예견했던 지구 종말의 날이 왔다. 그와 동시에 체육대회였고, 소리와 태원이 사귀게 된 지 무려 5일이나 된 날이었다. 이상 기후 현상에 소리가 지구 종말을 조금은 확신하게 되었고, 둘의 관계마저 변하였으나 놀랍도록 달라진 것이 없었다. 소리가 이따금씩 태원과 입을 맞춘다는 것 외에는 말이다.

 체육대회는 시끌벅적했고 날이 더웠으며, 눈은 그친지 오래였다. 등짝에 '똥쟁이.'라는 단어가 거대하게 박힌 반티를 입고 붉은색 응원봉을 한손에 든 소리가 팔뚝으로 이마부터 시작해 목덜미까지 흘러내리려 하는 땀을 닦았다. 허무맹랑한 '지구종말론'을 믿는 사람이 극소수였기에 예정대로 열린 체육대회였다. 판 뒤집기, 줄다리기, 피구 등 언제나 같은 패턴의 오전 경기는 진즉 끝난지 오래였다. 점심밥도 이미 먹었고, 2인 3각 경기도 했고, 곧 있으면 체육대회의 끝이라 불리우는 계주가 시작될 차례였다. 

마지막 주자였던 소리가 괜한 긴장감에 이온음료만 벌컥벌컥 들이키고 있자, 태원이 소리를 일으켜 끌었다. 태원의 걸음이 멈춘 것은 학교 뒷편이었다. 장소에 도착하자 곧바로 손을 뗀 태원에 소리가 아쉬운 듯 팔을 매만졌다. 태원의 온기가 아직도 남아있는 것 같았다. 애써 그 감각을 무시하고 여기는 왜 온 것이냐 묻자 태원이 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던져줬다. 태원이 던진 것을 가볍게 받아 쥔 소리가 손바닥을 펴자 앙증맞은 크기의 레몬맛 사탕이 있었다. 

 

 "이건 뭐냐?"

 "사탕. 너 긴장했으니까 먹으라고."

 

 태원의 얼굴을 한 번, 다시 사탕이 올려져있는 손바닥을 한 번 본 소리가 껍질을 까 입에 넣었다. 혀에 닿자마자 시고 단 맛이 입안을 가득 메웠다. …단 거 좋아하지도 않는데. 긴장 좀 풀리지? 입꼬리를 활짝 올려 말하는 태원에 소리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탕이 아닌 태원 때문에 풀린 긴장이었지만. 아무렴 어떤가 싶었다. 

 

 "개소리! 너 이제 준비해야 돼."

 "어, 어……. 간다."

 

 어디서 나타난 건지 저를 부르고 다시 되돌아가는 동급생에 대답한 소리가 발을 떼기 전, 태원에게 말했다.

 

 "계주에서 일등하면… 내 소원 들어줘."

 "소원?"

 

 안 되냐? 조심스러운 물음에 고민하던 태원이 유한 답을 내놓았다. 돈 달라 이런 것만 아니면, 알았어. …약속한 거다. 소리가 활짝 웃음 지었다. 마치 태양빛을 머금은 듯한 미소에 무슨 소원인지는 몰라도 가능한 이상 들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저도 모르게 든 태원이었다.

 

*

 

 "2반 화이팅, 2반 화이팅!!!"

 

 마지막 주자들이 라인앞에 나란히 서있었다. 소리가 속한 4반은 현재 1등인 2반과 비등한 2등이었다. 반바퀴를 달리고 돌아온 주자의 바톤을 넘겨받은 소리가 달렸다. 4반 이겨라!!! 커다란 응원소리를 들렸다. 소리의 시선은 태원에게 머물렀다. 잔뜩 긴장한 표정을 하곤 양 주먹을 꼭 쥔 상태였다. '존나 귀여워.' 부끄러운 생각이 머릿속을 잠깐 지배했고, 고개를 다시 앞으로 한 소리가 속도를 높였다. 20센티, 10센티, 반발자국. 점점 격차를 좁힌 소리는 할 수 있는 한 빨리 뛰었고, 이내 추월했다. 1등과 2등이 뒤바뀌는 순간 함성소리는 더욱 커졌고, 가장 먼저 도착 지점에 들어선 건 소리였다. 소리는 저에게 보내는 무수한 환호를 무시한 채 스텐드에 앉아있던 태원을 붙들고 달리더니 체육관 뒤쪽에서 멈추었다. 그렇게 달리고도 체력이 남아나는 소리와 달리 잠깐 달리고서도 태원은 힘든 듯이 거친 숨을 뱉었다. 

헉헉대며 소원이 뭐냐 묻는 태원에 소리는 답없이 태원을 껴안았다. 태원은 순간적으로 눈이 커졌지만 소리의 등에 팔을 감쌌다. 

 

 "잘했어. 멋있더라."

 "…이태원."

 "응."

 "내가 지금 중요하게 할 말이 있거든."

 "뭔데?"

 "아무 말 하지 말고 들어."

 

 내가…… 너를… 허억. 소리가 숨을 들이켰다. 아무 말 하지 말라던 소리의 말을 잊고 입을 연 태원이 입을 꾹 다물었다. 숨이 가빴다. '신호.' 둘의 머리를 스쳐가는 단어였다. 모든 산소가 사라지며 지구가 종말할 것이라는 이야기. 그 이야기의 끝이 왔다.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는, 태어날 적부터 본능적으로 해왔던 행위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들이마실 수 있는 산소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에. 

 

 "내가… 너를…."

 "…."

 

 한자씩 뱉어내면서도 소리는 기침을 했다. 차라리 아무말도 하지 않으면 좋으련만, 소리는 꼭 해야만 하는 말이 있었다.

 

 "좋…."

 

 ……아해, 이태… 원. 흡…. 끝내 완성한 문장이었다. 그 짧은 문장에 태원은 답답한 기분을 느꼈다. 처음이자 마지막의 절절한, 날 것의 고백. 무슨 말을 해도 가볍게 느껴질 것 같았다. 숨이 턱턱 막히는 걸 느끼며 천천히 소리앞에 걸어온 태원이 입술을 부딪혔다. 그간 소리가 먼저 해온적은 있어도 태원이 먼저 한 적은 없었던 입맞춤. 처음이자 마지막일 입맞춤. 소리와 입을 맞춘 채로 태원이 웅얼였다.

 "…나도."

 "…."

 "나도, 좋아…… 해."

 

이제 우주에서 보자, 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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